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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독서_본깨적

지하로부터의 수기_도스도옙스키

by 잼재미2023 2025. 1. 26.

 

 

 
 

 

-나는 밥벌이를 하기 위해(오직 이 때문이었지만) 관직 생활을 하다가 작년에 먼 친척이 6000루블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을 때 당장 사표를 내고 내 방구석에 틀어박혔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평생 생활하는 데 적당한 돈이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맹세하건대, 여러분, 너무 많이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병, 그야말로 진짜 병이다.

 

-이건 그냥 잡탕이다, 하는 식의 몽상인데, 뭐가 뭔지도 알 수 없고 누가 누군지도 알 수 없지만, 이렇게 통 영문을 모르겠고 속임수를 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어쨌거나 아프고, 영문을 모르면 모를수록 더욱더 아픈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스스로에게 침잠한다.

 

-나의 농담은, 여러분, 물론 품격도 떨어지고 변덕스럽고 앞뒤도 안 맞는 데다가 자기 불신감마저 가미되어 있소. 하지만 실상 이건 내가 나 자신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오. 도무지 의식이 발달한 인간이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존경할 수 있겠소?

 

-내가 버팀목으로 삼을 만한 근본적인 원인들이 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근거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것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나는 사유하는 연습을 하고 있고, 따라서 내 경우엔 어떤 것이든 하나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장 다른 원인을, 더욱이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끌어내어,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게 바로 온갖 의식과 사유의 본질이다. 고로, 이게 이미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다. 마침내, 결과적으론 대체 어떻게 될까? 그게 그것이다.

 

-오, 여러분. 내가 스스로를 현명한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오직 평생 동안 뭐 하나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수다쟁이라고 한들, 우리가 죄다 그렇지만, 설령 백해무익하고 짜증나는 수다쟁이라고 한들 어떤가. 어차피 모든 현명한 인간의 그야말로 유일한 사명이 수다, 즉 머리를 굴려 공소한 잡담을 늘어놓는 데 있다면, 어쩌란 말인가.

 

-이익이라니! 이익이란 무엇인가? 그래, 여러분은 인간의 이익이 대관절 어디에 있는지 완전히 정확하게 정의할 자신이 있는가? 만약 인간의 이익이 때때로 어떤 경우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불리한 것을 바라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틀림없이 그렇다면 어쩔 텐가? … 인간의 이익이란 것이 완전히 정확하게 계산된 것일까? 어떤 분류에도 포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포함될 수도 없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 여러분 거의 누구에게나 그의 최상의 이익보다 더 소중한 어떤 것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을까, … 이 이익을 위해서 인간은, 만약 필요하다면, 모든 법칙에, 즉 이성과 명예와 평온과 안락에 역행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한마디로 말해서, 이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것에 정반대될지라도 그에게 제일 소중하고 가장 유리한 이익, 이 근본적인 이익을 손에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이 이익이 뛰어난 것은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모든 분류법을 와해시킴은 물론이고 인류애를 부르짖는 자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세워 놓는 모든 체계를 꾸준히 부숴 버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이익이 모든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성은 오직 이성일 뿐이어서 오직 인간의 이성적 판단력만을 만족시킬 뿐이지만, 욕망은 삶 전체, 즉 이성과 온갖 긁적임을 포함하는, 인간의 삶 전체의 발현이다. 그 발현에 있어 우리의 삶은 종종 너저분한 꼴이 되기 십상이지만 그럼에도 삶은 삶이지, 한낱 제곱근 개평방법 따위는 아니다. … 이성이 대체 뭘 알겠는가? 이성은 자기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만을 알지만 인간의 본성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오롯이 그 자체로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으로써 행동하고 설령 거짓말을 할지언정 어떻든 살아가긴 한다.

 

-인간이 그냥 어리석다 못해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을, 심지어 자기에게 해로운 것을 일부러, 의식적으로 바라는 경우가 한 번, 정말 딱 한 번은 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을 바랄 권리를 갖기 위해, 오직 현명한 것 하나만을 바랄 의무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다. … 이것이야말로 우리 같은 인간에겐 정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이로운 것일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특별히 더 그렇다.

>변덕?

 

-인간이 파괴와 혼돈을 그토록 좋아하는 것은 혹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지금 짓고 있는 건물이 완성되는 것이 그 자신도 본능적으로 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여러분이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인간은 오직 먼발치에서만 그 건물을 좋아할 뿐, 가까이서는 절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주에 살 때 한라산을 올라보고 나는 그냥 한라산을 멀리에서 바라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이상이나 꿈에 대한 희망에 젖는 것이 꿈을 직접 쫓으며 힘든 일을 겪고, 생각과는 다른 현실에 좌절하는 과정보다 훨씬 편하고 달콤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변수와 불편함에도 굳이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행함으로써 알게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어서다. 내가 목표에 도달해서 무엇을 얻음으로써 만족하는지, 어떤 것에 좌절하는지. 아니면 그저 꿈꾸는게 더 좋았는지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엔 모두 나를 알고자하는 움직임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래도 나는 인간이 이따금씩은 진짜 고통, 즉 파괴와 혼돈을 거부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고통이야말로 실상 의식의 유일한 원인이니까. 처음에는 의식이란 것이 내 생각으론 인간에게 있어 크나큰 불행이라고 말했지만, 인간이 그것을 사랑하여 그 어떤 만족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의식은 예컨대 2x2보다는 무한히 더 높은 것이다. 2x2 이후엔 할 일이 전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알아내야 할 것도 전혀 없어질 것이다. 그때 가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자신의 오감을 틀어막고 명상에 잠기는 것뿐이다.

 

-나는 하다못해 나 자신 앞에서만큼은 완전히 솔직해질 수 있을까, 그 어떤 진실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곁들어 지적하자면, 하이네는 믿을 만한 자서전이란 거의 있을 수 없다고, 인간이란 스스로 자신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그러니까 오로지 허영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에게 온갖 죄를 덮어씌우는 일이 이따금씩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며, 심지어 이것이 어떤 종류의 허영심인지도 아주 잘 간파하고 있다.

>동의한다. 나도 나 혼자만 보는 일기에조차 허영심으로 포장된 말을 늘어놓곤 하니까. 드는 생각을 기만 없이 솔직하게 적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양반들 중 아무도 옷에 관해서든 얼굴에 관해서든 저기 무슨 정신적인 측면에서든 당혹스러워하는 일이 없었다. 이자도, 저자도 사람들이 자기를 역겨움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상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그들도 그들만의 지하실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무한한 허영심에 가득 찬 나머지 나 자신에게 너무 까다롭게 굴었고 그 결과 나 자신을 역겨움에 가까운 광포한 불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극히 잦았으며, 또 이 때문에 혼자만의 생각 속에서 나의 시선을 모든 사람들에게 투사했던 것이다.

>내가 나의 지옥을 만든다. 자신이 지옥이라 생각하면, 세상이 모두 지옥으로 보인다.

 

-지적으로 성숙했고 점잖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한히 까다롭지 않고서는, 또 어떤 순간엔 자기 자신을 증오할 만큼 경멸하지 않고서는 허영심에도 사로잡힐 수 없다.

>자가검열 후 스스로 성숙하다고 생각했던 순간들과 경멸하던 순간들. 나의 허영심에 대해 생각해본다.

 

*주인공은 정신승리자의 표본인 듯.ㅋㅋ (웃지마 니 얘기야)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광분한 것은 이러고서도 갈 것임을, 일부러라도 갈 것임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기 가는 것이 미련한 짓일수록, 또 무례한 짓일수록 더더욱 갈 것이란 말이다.

>알면서도 왜 그럴까! 이 물건을 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이 음식이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더더욱 하고야 마는 걸까.

 

-인간이란 자기 괴로움을 세는 것만 좋아하지. 자기 행복은 아예 세질 않아. 만약 제대로만 센다면 누구나 자기 몫이 있다는 걸 알게 될 텐데.

 

-“저기 어떤 여성이 나리를 뵙고 싶어 하시는데요.” 그는 유달리 엄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 다음, 옆으로 비켜서며 리자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우리의 심연을 반영하는 무수한 생각들과 억측 중 때때로 맞아떨어지는 경험들이 더욱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듯.

 

-하지만 어떻든 참 기막힌 노릇이다. 히스테리란 반드시 가라앉게 마련이거든. 그러니까 소파에 엎드려 걸레 같은 가죽쿠션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자니, 이제 와서 고개를 들고 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사실 꽤 거북하리라는 느낌이 시나브로 어렴풋이, 어쩔 수 없지만 거침없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제는 내 쪽에서 하릴없는 질문을 하나 던져 본다. 값싼 행복과 숭고한 고뇌 중 무엇이 더 나을까? 과연 무엇이 더 낫겠는가?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부끄러웠다. 다시 말해,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 교도 감화를 위한 징벌이다. 사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령 내가 지하의 구석방에서 정신적인 부패에 시달리고 환경의 결핍을 맛보며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유리되어 허영심 가득한 분노나 키우고 그럼으로써 정작 삶을 놓쳐 버린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것은 맹세코 재미없는 일이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필요한 법인데, 여기서는 일부러 반주인공에게나 걸맞은 특성만 몽땅 모아 놓았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불쾌한 느낌을 준다는 점인데, 이는 우리 모두 삶으로부터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나 할 것 없이 다 절뚝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인데, 여러분은 자신의 비겁함을 분별이라 생각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생기로운’ 셈이다. 그럼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라! 실상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한다. 지금 대체 어디에 살아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또 그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를 단 한 권의 책도 없이 홀로 남겨 둬 보라, 그럼 우리는 당장에 갈팡질팡하고 어리둥절해질 것이며, 어디에 합류해야 하고 무엇을 따라야 할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할지 통 모를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조차. 자신만의 진짜 육체와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이것이 너무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나머지, 지금까지는 존재한 적도 없는 무슨 보편 인간이 되려고 안달복달한다. 우리는 사산아, 더욱이 이미 오래전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태어나는 존재이며, 또 이것이 우리는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취향에 맞는 모양이다. 조만간 우리는 어떻게든 관념으로부터 태어날 궁리를 할 것이다. 하지만 됐다. 더 이상 ‘지하에서’ 이렇게 쓰고 싶지 않다.

 

>이 얇은 소설을 읽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없이 생각을 늘어놓는 것부터 자기혐오와 열망과 합리화로 범벅되고 호흡이 긴 문장에서 혼돈을 느꼈다. 무엇보다 이 지하인간의 문장들이 나를 관통해 자꾸만 나의 절뚝거림을 보도록 만들었던 점이 제일 힘들었다. 이 지하인간도 찌질하지만 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은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더 선명해졌다. 심지어 허심탄회하게 적는 것은 오히려 나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지하인간은 그냥 ‘나’의 세미버전인게 아닐까. 사람들이 으레 대답하듯 2X2를 물으면 나도 4라고 대답한다. 때로는 허영심에 차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수시로 나와 남을 기만하고 나를 혐오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은 뒤 조금은 변한 것이 있으니. 나에게서 드러나는 모순과 혼돈, 지하인간성을 알아채고 관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물론 매번은 아니다) 2x2에 대한 나만의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비통념적 인간이 되기를 바라며. 관조의 범위를 늘려 모순과 혼돈의 존재를 인정하고 지하실과 세상을 자유롭게 오고가는 내가 되어가길 바라며.